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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영화 서울의 봄과 1212사태, 실존 이야기(관련 정보)

by 스.진.남.(스포츠에 진심인 남자)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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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 

감독 : 김성수

출연배우 : 황정민, 정우성, 이성민, 박해준 등

줄거리 

1979년 12월 12일, 서울에서 군사반란(쿠데타)이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대통령(박정희)이 10월 26일 암살당한 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광이 반란을 일으키고 군 내 사조직을 총동원하여 최전선의 전방부대까지 서울로 불러들인다.

권력을 잡기 위해 전두광의 반란군과 이에 맞선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을 포함한 집안군 사이, 9시간이 흘러간다. 각자의 목숨을 건 두 세력의 대립, 대한민국 수도서울에서 엄청난 전쟁이 일어난다. 

영화 서울의 봄

 

1212 사태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이 조직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반란

 

1212 사태 사건의 시작

1927년 10ㆍ26 사태가 일어난 후 이를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역임하고 있는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사이에 사건 수사와 군 인사 문제를 놓고 갈등이 있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ㆍ26사태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사항들을 내세워 정승화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하였다. 

 

1212 사태 진행과정

1979년 11월 중순 경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1 군단장 황영시, 수도군단장 차규헌, 9 사단장 노태우 등과 논의하고 12월 12일을 거사일로 결정한다. 20 사단장 박준병, 1 공수여단장 박희도, 3 공수여단장 최세창, 5 공수여단장 장기오 등과 또한 사전에 연락하고 12월 초 전두환은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과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육본 범죄수사단장 우경윤에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 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다. 

 

따라서 12일 저녁 허삼수, 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병력 50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진입하여 경비원들에게 총격을 가하며 제압한 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하였다. 

 

정승화 육참총장 연행에 저항할 수 있는 특전사령관 정병주, 수경사령관 장태완, 육본 헌병감 김진기는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에게 연희동에서 회식에 초대되었고 식사 도중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 사실이 전해지자 정병주, 장태완 등의 육군장성들이 대응태세를 갖추려 했으나 이미 전두환이 박희도(1 공수여단장), 장기오(5 공수여단장)에게 지시하여 국방부와 육본을 점령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와 육군지휘부를 무력화시킨 후였다. 

 

정병주(특전사령관)와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은 수도권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신군부와 군사반란에 대응하려 했으나 신군부는 전방을 지키는 9사단(노태우)을 끌어들이며 대처하였고 신군부는 정병주와 장태완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며 진압군을 무력화시켰다. 

 

이 과정의 전부는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의 재가 없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총장연행 재가를 요청하였으나 국방장관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신군부는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을 체포하여 대통령이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 재가를 설득하였고 결국 대통령 최규하는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하였다. 

 

그 당시 전두환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가 시해된 10.26 사태 시 정승화 육참총장은 박정희가 시해된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김재규의 초청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 시해 시 현장에 정승화 육참총장이 있었으므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은 이 논리로 정승화를 체포하였다. 

 

하지만 전두환은 그 당시 계엄상황이었고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었으므로 결국 전두환의 상급자였다. 그 당시 대통령 최규하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승화 육참총장도 10.26사태 관련 모든 수사를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임한 전두환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고 육사 11기 생도로 출발하여 엄청난 군부 사조직 하나회의 리더였으므로 이 조직이 어떠한 활동을 만든다면 조치가 불가할 정도로 커져있다고 육참총장은 생각했을 것이다.

따라서 정승화 육참총장은 전두환을 동해경비대로 전출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에게 이러한 첩보가 전두환에게 들어갔고 이것이 전두환을 움직이게 한 이유가 되었다. 

 

1212 사태 그 이후

쿠데타가 성공하자 신군부는 빠르게 정권을 장악해 나갔고 전두환은 순식간에 대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하지만 그야말로 권한이 없는 대통령이었고 전두환은 이런 과정에 전 국민적으로 불만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 1980년 5월 타깃을 광주로 삼아 5월 18일에 광주에 대학살을 기획하고 실행했으며 1980년 9월 최규하 대통령을 밀어내고 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대통령 당선 근거는 유신체제 하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통해 당선되었고 박정희의 이름을 지우고 싶어 80년 10월에 8차 개헌을 한다. 8차 개헌의 요약은 7년 단임제, 간선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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